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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점장 구달의 장바구니
    • EP04. 분홍색 양말 연구
    • EDIT BY 구달 | 2022. 9. 16| VIEW : 673

    평생 딱 한 가지 색깔 양말만 신어야 한다면 어떤 색을 택해야 할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심심하니까 고민해본다. 실용성을 고려하면 정답은 검은색이다. 출근, 가족 모임, 나들이는 물론 경조사까지 커버 가능한 데다 세련된 멋쟁이 혹은 ‘선택 피로’를 줄인 스마트한 현대인으로 각인될 수 있으리라. 흰색도 검은색 못지않게 실용적인데, 순백 양말 원리주의자가 아니라면 아이보리와 크림색까지 허용함으로써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검은색과 흰색만큼은 피하고 싶다. 급식 먹던 시절에 주 6일씩 6년을 내리 신은 걸로 충분하다고 본다. 더군다나 내 패션 취향은 촌스럽고 귀여운 쪽. 시크한 무채색 양말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다.
    최애 컬러를 택하는 것도 방법일 듯하다. 보라색을 좋아해서 보라색 양말만 모은다는 손님을 만난 적이 있다. 연보라부터 환타 포도색까지, 손님이 고른 양말을 종이봉투에 쪼르르 담을 때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매일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발목을 감싼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단조로운 행위가 아닌 다채로운 기쁨이 되어줄 것이다. 한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내 최애 컬러는 남색이고, 남색 양말은 보통 클래식한 디자인이 많다. 말인즉 촌스러운 맛은 살릴 수 있어도 귀여운 쪽으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차애 컬러를 택해야겠지. 촌스러운 매력과 귀여운 매력을 둘 다 가진 욕심쟁이 컬러, 분홍색이다.

    우리 매장에는 분홍색 양말이 몇 종류나 있을까. 손님이 없는 틈에 한번 헤아려보았다. 여성용 21종, 남성용 7종, 아이용 8종. 하늘 아래 같은 핑크는 없다더니, 겹치는 톤이 하나도 없다. 분홍색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어떤 채도와 명도로 뽑아내든 대체로 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색깔은 조금만 탁해도 싫고 조금만 옅어도 별론데 분홍색만은 그렇지 않다. 걸쭉하게 진한 꽃분홍은 뻔뻔해서 귀엽고, 엷디엷은 벚꽃색은 오묘함에 눈이 간다. 주홍이 섞인 분홍은 발그레한 아이 뺨 같아서 꼬집어주고 싶다. 회색빛이 도는 분홍색은 늦은 오후 지하철 안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풍경을 닮았다. 핫핑크가 사라진 세상 같은 건 상상만으로 따분하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분홍색으로 물들인 양말은 보기에 흐뭇할 뿐 아니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분홍색 양말은 ‘올라운더’다. 인디고 데님 팬츠에 신으면 꾸러기 느낌이 난다. 블랙 원피스에 매치하면 화려함을 더한다. 브라운 컬러 의상에는 포근하게 스며든다. 하늘색에 코디하면 디즈니 재질로, 베이지에 코디하면 지브리 재질로 소화 가능하다. 연령과 성별도 타지 않아서 돌부터 칠순까지 생애주기의 어느 구간에서나 누구에게나 사랑스럽게 어울린다.

    칠순까지 신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매장에 진열된 분홍색 양말 가운데 한 켤레를 집어 바코드를 찍었다. 굿마더신드롬의 기본 컬러 양말로, 색상 이름은 페일 핑크(Pale Pink)다. 전체적으로는 연분홍에 주홍을 딱 한 방울 섞은 색이고 발뒤꿈치만 조금 더 짙은 홍학색이다. 보자마자 〈피구왕 통키〉 오동도 주장의 오동통한 볼이 생각났는데 1990년대에 초등학생이었다면 공감하리라고 믿는다. 셀프 계산을 마친 양말을 냉큼 갈아 신었다. 역시 머릿속으로 그린 그대로였다. 나의 여름 교복인 짙은 회색 반바지에 찰떡같이 어울렸다. 사실 이 양말이 지난주에 입고되었을 때부터 탐이 났는데 여름 세일 기간에 지른 죄(?)가 많은지라 A4 용지 한 바닥 분량의 구구절절한 명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