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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점장 구달의 장바구니
    • EP09. 하객 패션 양말
    • EDIT BY 구달 | 2023. 2. 15| VIEW : 1260

    남동생에게 난생 처음 용돈 봉투를 받았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겉봉에 ‘작은누나’라고 적은 봉투에는 거금 20만 원이 들어 있었다. 한글을 아직도 이렇게 못 쓰는 애가, 변기 물을 휘휘 저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뒤뚱뒤뚱 걷던 녀석이 어느새 훌쩍 커서 결혼을 한단다. 예복을 사 입으라며 동생이 건넨 봉투를 냉큼 받아 챙겼다. 누이는 괜찮으니 살림살이 장만하는 데 쓰려무나, 하고 멋있게 거절하기에는 쇼핑의 유혹이 너무나도 컸다. 동생 찬스로 꼬까옷을 사 입을 기회가 내 평생 두 번은 없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돈 봉투를 품에 넣고 예복을 사러 나갔다. 목적지는 요즘 핫한 브랜드 쇼룸이 다 모여 있다는 한남동. 가는 길에 유튜브로 미리 공부를 좀 해보니 11월 하객 패션으로는 재킷에 터틀넥, 와이드 팬츠가 대세였다. 재킷은 집에 있는 걸 활용하고 와이드 팬츠랑 터틀넥만 장만하면 예산을 맞출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분명 계산은 섰는데…. 한남동에 도착해 옷가게를 하나씩 둘러보기 시작하자 최신 유행하는 아이템에 눈이 핑핑 돌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 손에는 12만 원짜리 하이넥 반집업 맨투맨이 들려 있었다.

    참으로 즐거운 쇼핑이었지만 동생 결혼식에 맨투맨을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방구석에서 인터넷을 뒤진 끝에 옷 하나를 골랐다.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길고 우아한 검은색 맥시스커트(와이드 팬츠는 7만 원 이하로는 구할 수가 없었다). 역시즌 제품이라 거의 반값에 샀는데 길이감이 있어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구입한 빈티지 셀린 재킷에 매치하니 제법 잘 차려 입은 느낌이 났다. 외투 단추를 잠그면 어차피 눈에 잘 띄지 않을 터틀넥은 기본으로 저렴하게 구했다. 이로써 하객 패션의 90%가 완성되었다. 봉투에 남은 돈은 단돈 만 원, 사야 할 품목도 단 하나 남았다. 물론 양말이다.

    나처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데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양말을 고를 때 기억해 두면 유용한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실켓’이다. 면사를 가공하여 은은한 광택감을 살린 실켓 양말은 고급스러운 느낌을 내면서 가격은 합리적이다. 내구성도 좋아서 기본 컬러와 포인트 컬러를 섞어 서너 켤레 정도 마련해 두면 한동안은 양말 걱정 없이 각종 행사(feat.관혼상제)를 소화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매장에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이 실켓 양말을 사러 오는 경우가 꽤 많다. 예비 신부가 방문한 기억은 없지만 분명 웨딩드레스에도 잘 어울릴 테다. 연말 시상식이 열리는 날 에첼의 크림색 실켓 양말을 사 간 연예인 손님도 있었다. 그만큼 실켓 양말은 드레시하다.

    하객 패션에 화룡점정을 찍을 양말을 고르기에 앞서, 남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는 누나 역할에 충실하자며 정신을 다잡았다. 또다시 맨투맨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때는 동생의 놀림을 면치 못할 터였다. 조잡한 귀여움을 추구하는 평소 취향은 잠시 접어두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양말을 찾는 데 집중했다. 신중을 기해 선택한 양말은 삭스타즈 패션(SOCKSTAZ FASHION)의 우먼 실켓 립 크루 삭스, 색상은 차분하지만 존재감이 또렷한 와인색으로 골랐다. 착장을 갖추고 미리 신어보니 맥시스커트 뒤트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빛 광택이 아주 근사했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양말이 맞다. 12만 원을 엉뚱한 옷을 사는 데 써버린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실켓 양말 쇼핑을 끝으로 나의 하객 패션은 100% 완벽해졌다. 동시에 제 소임을 다한 용돈 봉투는 속이 텅 비어 납작해졌다.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워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다. 글씨가 왜 아직도 이 모양이냐고 두고두고 놀리려면 소중히 간직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