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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재니져의 출근일지
    • DAY04. 바리스타의 양말
    • EDIT BY 재인 | 2023. 3. 9| VIEW : 709

    봄은 비로소 양말의 계절이다. 겨우내 긴 바지 아래, 두툼한 어그 부츠 속에, 가끔 발바닥 아래 핫팩을 숨기고 있는 양말과 다르게 나는 봄이야말로 양말을 드러내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고 믿는다. 여름에는 맨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페이크 삭스, 양말이 아닌 척하는 양말이 대세니까 금방 다가올 여름을 피해 부지런히 양말을 신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양말을 사랑하는 양말광의 시점이라 연말에 비하면 매장에 손님이 부쩍 줄었다. 연말의 즐거운 분위기에 휩쓸려 들러주시던 손님들은 모두 새해가 되어 마음을 다 잡은 느낌이다. 아니면 이미 봄옷을 마련하느라 바쁜지도 모르고.

    대신 봄에는 진짜 양말에 진심인 손님들이 찾아오신다. 양말을 위해 탕진할 돈을 따로 모아둔 사람들. 그들을 위해 양말 브랜드에서도 신상을 몰아치듯 쏟아낸다. 매주 화요일, 가게 유리창 너머로 CJ 택배 차가 멈추면 나는 미리 문을 열어둔다. 곧이어 덩치 큰 택배 기사님이 커다란 박스를 여러 차례 카운터 옆으로 옮겨 주신다. 이제부터 팔을 걷어붙일 시간. 이미 꽉 찬 선반 위 양말들을 요리조리 옮겨 가며 테트리스 하듯 적당한 자리를 찾아준다.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VIP 좌석이 있는지라 이번 주에는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까 고심한다.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양말도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긴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면 너 나 할 것 없이 만지작거리는 양말이 된다. 그렇게 양말 정리가 한창일 때면 윗집 리사르 직원분들이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가져다 주곤 한다.

    누구보다 봄에 양말 가게에서 탕진을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같은 건물 리사르 직원들이다. 점심시간이면 잠깐 틈을 내 놀러 왔다가 양말을 한두 켤레씩 사 가더니 어느 순간 양말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신상이 업데이트되면 구경을 오고 지인들이 놀러 오면 양말 가게를 소개해 준다. 서있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바리스타들에게 의외로 인기가 많은 양말은 운동 양말이다. 하쿠의 귀여운 더미 삭스(Dummy Socks)나 삭스타즈의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스포츠 삭스를 좋아한다. 신었을 때 느껴지는 푹신함은 운동할 때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발의 피로를 덜어준다. 작은 이벤트가 있을 때 서로를 위해 양말을 사러 오는 모습을 보면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한 켤레의 양말에 담기는 마음. 보드랍고 푹신푹신하고 따뜻한 것.

    그렇게 오가는 양말과 커피 속에 우정이 싹튼다. 어느 날은 리사르 매니저님이 제비꽃을 꺾어 반지를 만들어주셨다. 봄이니까 우리에게 낭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낭만은 아주 흔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또 누군가는 귀찮아할 법한 일이다. 퇴근 후에 봄바람을 맞으러 한강에 가는 피크닉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한강을 눈에 담으며 한참 내달리다 도착한 미니스톱 한강 잠원 2호점에서 라면을 먹고 한남대교를 건너 각자의 집으로 가는 루트. 다행히도 죽이 척척 맞는 우리에게 이 계획은 피곤하긴커녕 설레는 소풍이다. 퇴근 전부터 근처에 있는 따릉이를 찾아보고 칼같이 퇴근을 마쳤다. 골목을 돌아 돌아 공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꾸 들뜬다. 자전거를 끌고 자전거 도로가 있는 한강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밤의 광경이 펼쳐진다. 많은 야경을 봐왔지만 이 순간과 비슷한 건 보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양말 파는 일과 상관없는 이야기. 그런데 이런 낭만이야말로 양말 가게를 따뜻하게 데우는 이야기다.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에 설레고, 또 봄을 기다리게 되고, 또다시 봄의 양말 가게를 사랑하게 되니까. 봄에 신을 양말, 봄에 만날 손님, 봄에 함께 놀아줄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