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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작은 물건 이야기
    • ‘발끝까지’ 나
    • EDIT BY 김해서 | 2024. 6. 9


    양말의 자리는 언제나 서랍장 한 칸이었다.

    독립하기 전, 가족들과 한 지붕 아래 살았을 때부터 그랬다. 4인분의 양말을 계절 구분 없이 한 칸 안에 모조리 넣어 보관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서랍장을 추억하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열 때마다 한 짝이 뒤로 넘어가 서랍이 제대로 안 닫히거나, 찾는 양말이 다른 식구의 양말에 깔려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면 마구 안을 헤집어놓아 엉망이 되곤 했다. 그 혼돈 속에서 엄마 양말을 내가, 집에서 제일 발이 큰 남동생 양말을 엄마가 신을 때도 있었다.

    대가족이 아니었음에도, 우리 집 사람들에겐 ‘정리’가 뭔지 ‘자기 몫’이 뭔지 따지는 행위는 어리석고 무용한 일이 되곤 했다. 그래서 스무 살이 되어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살이용 ‘나만의 짐’이 생기고부터 ‘정리정돈’과 어색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배운 적 없는데 무슨 수로 깔끔하게 산단 말인가?) 대학 기숙사, 쪽방, 하숙집, 월세방, 전세방을 전전하며 짐 더미를 짊어지고 사는 동안, 내가 좋아서 산 것 혹은 나였기 때문에 지닌 것들에 깔려 압사할 것 같았다. 뒹구는 것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나인 것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양말은 주인의 고난을 함께하며 서랍장 한 칸은커녕 가방 포장지였던 싸구려 파우치 안에서 연명해야 했다. 가련하게도.

    부엌과 침실이 구분되고, 옷방 겸 창고 겸 파우더룸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이 딸린 집으로 마침내 이사한 날. 나는 ‘드디어!’를 외치며 지갑을 열어 젖혔다. 제일 먼저 산 것은 책장. 자가도 없는 주제에 ‘사치스러운 책벌레’로 살던 내 염치없음을 얼마나 저주했는지 모른다. 책장이 해결되자마자, 바로 서랍장을 검색한다. 니트와 속옷, 양말, 잠옷, 잡동사니 등이 뿔뿔이 흩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양말의 거처는 새로운 서랍장의 맨 아래 칸이 되었다. 이번에도 겨울/ 여름 양말 할 것 없이 모조리 한 칸 신세. 양말은 ‘발’이라는 신체의 아주 좁은 면적을 위한 패션용품이다. 부츠를 신거나, 소위 ‘바닥 쓸고 다니는’ 기장의 하의를 입게 되면 존재를 드러낼 일도 없다. 어차피 내 것은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고, 그날의 메이크업과 옷 코디가 결정되면 귀걸이와 함께 맨 마지막에 골라 드는 아주 작은 한 끗일 뿐이니 맨아래 칸이 적절했다. 다른 중한 것들에 밀려, 양말은 이번에도 눈에 띄지 않는 외딴 귀양지로 보내졌다.

    그 한 끗 때문에, 어느 날부터 외출 준비를 할 때 서랍 앞에서 골똘해지는 시간이 늘어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뭔가 아쉬웠다. 늘 신던 흰검 양말들이 왜 거슬리는 거지?

    가족과 학교의 자장을 벗어나면서 화장법도 옷 스타일도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로 바뀌었다. 원 없이 멀어졌다. 집도 넓어지니, 그 ‘멀리 와버린 취향들’이 속속들이 자리를 잡았다. 나만의 책장, 나만의 옷방이 생긴 건 정말 감격스럽다. 그뿐인가? 불면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퀸사이즈 침대라는 거대한 짐을 또 만들기까지 했다. 나다운, 날 위한 선택이라는 합리화로 계속 물건들이 늘어나는 동안 양말의 처지만 한결같았다. 물끄러미 서서 칙칙한 한 쌍의 발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거슬린다.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운 양말을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글리터가 박혀 있거나 은사가 엮여 있거나 캐릭터가 커다랗게 자리하거나 두툼하거나 귀여운 꽃무늬가 새겨진. 아무도 크게 관심을 주지 않아도, 고작 235~240mm 언저리의 아주 좁은 구역을 위한다 하더라도, 코디의 마지막 단계에 좋아하는 양말을 꺼내는 순간 시트러스 향수처럼 밝은 기운이 몸을 감싼다.

    네 양말이 내 양말이고 내 양말이 네 양말이기도 했던 무채색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무채색 위에 알록달록한 양말들도 첩첩 쌓이고 있다. 본가에 잠시 머물 때도, 이제 식구들은 무늬나 색만 보고 빨랫감 무더기 속에서 김해서 양말만은 알아챈다. 이제 나는 ‘발끝까지’ 나라고 할 수 있으려나.

    흐뭇한 마음으로 ‘혹시 모르는 일’을 떠올려보는 건 언제나 즐겁다. 양말 쇼핑에도 흥미가 붙어 양말 칸이 서랍장 아래에서 위로 승급되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거니까.





    작은 물건 이야기
    Everyday Petits
    양말, 립스틱, 그릇, 만년필, 수첩 같은 작은 물건을 이야기합니다.
    매일 기계적으로 쓰고 있어 의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우리가 서재, 책상, 찬장, 안방, 화장대에서 하루 단 이십 초 안팎의 시선을 주는 것들에 대해.
    서사를 붙여주면, 얼마간은 진짜 ‘내 것’이 되리라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