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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재니져의 출근일지
    • PAGE 02. 운명적인 입사군요
    • EDIT BY 재인 | 2022. 12. 14| VIEW : 491

    첫 출근. 축축하고 서늘했던 사월. 집 앞 담벼락에는 라일락이 비를 맞고 축 늘어져 있었다. 역에서 내려 학교를 다닐 때 걷던 길을 따라 걸었다. 대표님이 집에서 삭스타즈까지 너무 멀지 않느냐고 물으셨고 몇 년을 오간 길이라 괜찮다는 나의 대답에 ‘운명적인 입사군요’하고 답하셨다. 양말 가게에 운명적인 입사?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이 흘러가고 있지만 일단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쇼룸 앞에 도착해 창 앞에 진열된 알록달록한 양 말들을 슬쩍 구경하고, 출근까지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쇼룸 위 카페로 향했다. 카멜 커피가 리사르로 바뀐지 도 모르고 인테리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며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저기 저 장미 담장은 작년에 대학 동기들과 와서 사진을 찍었던 자리네. 잠깐 회상에 잠겨있는 사이 작은 에스프레소 잔이 나왔다. 카라멜 마끼아또가 라 떼인 줄 알고 시켰는데 에스프레소였구나. 가지고 다니는 수첩을 펴 이 이야기를 적어두었다.

    튤립이 꽂혀있는 가게를 밖에서 들여다보며 서있었더니 먼저 출근한 조 매니저님이 나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여기에 옷을 걸면 되고요. 의자를 빼서 카운터에 저랑 같이 앉아 있으면 될 것 같아요. 출근 후 해야할 일들과 화 장실의 위치를 전달받고 자리에 앉아 손님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지금 재인 씨가 신은 그 양말이요. 비행기에서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을 형상화한 양말이래요. 초록 색 바탕에 구름 모양이 중간중간 그려진 본 메종 양말을 보고 조매니저님이 말했다. 듣고 보니 황토색, 연두색이 섞인 불규칙한 사각형과 마름모가 마치 하늘에서 논밭을 내려다보며 그린 그림 같았다. 본 메종 양말은 별생각 없이 봐도 그 자체로 멋졌지만 이 이야기를 알게 된 후에는 더 애정이 가는 양말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간 업무 인수인계를 받으며 함께 양말을 골랐다. 손님들에게 양말 브랜드와 생산지, 그리고 착용감까지 거침없이 소개하는 매니저님을 보고 있자니 이 모습을 양말 디자이너들도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닌 양말 일 테지만 적어도 이 가게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그들 도 안다면 뿌듯할 텐데. 작은 문제라면 삭스타즈 안에서 영업은 손님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양말을 지켜보는 매니저야말로 가장 영업하기 좋은 타깃이었다. 그다지 관심 없던 양말도 어느 날, 누군가 아 예쁘다! 감탄을 하며 사 가고 나면 그 순간부터는 신기하게 내 눈에도 예뻐 보이는 양말이 되었다. 이 양말은 이래서 멋져, 저 양말은 저래서 실용도가 좋아! 신이 나서 조 매니저님과 떠들다 보니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다음 주 수요일은 구달 점장님과 함께 일을 할 거예요. 2주가 흐른 어느 날 퇴근길에 조 매니저님이 스케줄 변 동을 알려주셨다. 좋아하는 작가님과 함께 근무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체크 양말에 민트색 젤리 슈즈를 꺼내 신 었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샤이니의 팬덤 색깔이었다. 종종 가는 동네 비건 베이커리에 들려 함께 먹을 마들렌을 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쇼룸을 향해 걸었다. 작가님을 만나서 우리 이름을 붙여 읽으면 ‘재인 구달’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 드려야지, 같이 종현의 앨범 이야기를 해야지, 출근보단 팬미팅에 가는 듯한 마음으로 청소를 할 때 틀 노래까지 생각해두었다. 그날 점장님은 내가 챙겨간 [아무튼 양말]에 반달이 그려진 예쁜 사인을 해주셨다.

    마음이 꼭 맞는 친구를 사귀고 좋아하는 작가님과 동료가 되었던 봄. 이 작은 반지하의 가게는 자세를 낮춰 키 를 돌려야만 문을 열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은 꽤나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손님들은 내가 이곳에 있는 모든 양말 의 정보를 꿰뚫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여러 질문을 던진다. 나는 그 질문에 가장 완벽한 답을 찾아 주고 싶어 애 쓴다. 하지만 사실 양말 쇼핑에는 정답이 없다. 손님은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양말을 골라 나갈 것이기 때문이 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도 정답이 된다. 그래, 결국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나가는 삶을 원한다. 어떤 작가 는 빵 고르듯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책을 냈던데. 그렇다면 나는 양말 고르듯이 살고 싶다. 마음이 내키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