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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에디터들의 책장
    • 지금 살아있다는 것: 아침의 피아노
    • EDIT BY 유잎새 | 2023. 6. 21| VIEW : 382

    얼마 전 친구와 마주한 자리에서 예상 못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게 실감 나요.“ 앞에 앉은 친구는 갓돌을 넘긴 아이를 엄마 집에 맡겨두고 2시간 짧게 시간을 낸 상태였다. 동선과 시간을 극적으로 맞춰 몇 달 만에 얼굴을 마주한 친구가 내 말을 듣고는 부처처럼 웃었다. 친구는 시간의 ‘유한’함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엄마가 된 후, 그녀의 하루는 쪼개고 쪼개 먹는 한 덩어리의 빵이 되었다. 일과 외부의 종종거림에 이만큼을 떼어주고 나면, 아이에게 줄 빵이 그만큼 부족해진다. 그건 시간이 물리적으로 만져지는 경험이어서, 빵을 잘게 쪼개는 순간마다 유한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고 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그것만 하면 좋을 텐데, 지금은 느긋하게 그 주제를 생각할 시간도 없거든요. 그래서 이럴 때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면서 그때그때 의미를 찾는 것도 삶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어디서든 찾을 수 있잖아요.” 친구는 지금껏 만들어온 인생에 더해진 ‘엄마’라는 새로운 역할이 덤덤하게 기쁜 표정이었다. 빵의 절반을 뚝 떼어주고 싶은 그 역할과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 절묘한 줄타기를 벌이고 있었다.

    자기만의 균형점을 찾은 듯한 친구를 보며 책 《아침의 피아노》를 떠올렸다. 《아침의 피아노》는 철학자 김진영 님이 암 선고를 받고 투병하며 임종 3일 전까지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다가오는 죽음을 피부로 체험하고 있는 철학자는 ‘흘러가는 물’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어제 축령산 휴양림에 왔다.
    물들은 자면서도 쉬지 않고 흐른다는 걸 알았다.
    흐른다는 게 산다는 건지도 알았다.’

    ‘그건 여기가 쉼 없이 물이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 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흘러가는 순간이 쌓여 생의 총량이 된다는 단순한 덧셈을 자꾸 잊어버린다. 오늘치의 의미가 쌓여 인생이 된다는 것도 잊어버린다. 철학자가 쓴 어느 날의 일기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있었다.

    ‘지금 살아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잊어선 안 될 것을 잊으며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2017년 7월부터 적힌 철학자의 일기는 2018년 여름을 향해 갈수록 점점 더 짧아진다. 그의 남은 여명을 보여주듯 옅어져 가는 일기에는 사랑과 감사,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가득 들어차 있다.

    조용한 날들을 지키기.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철학자가 남겨둔 말들을 읽으며 흘러가는 오늘을 꾹꾹 눌러쓴다. 자칫 모래처럼 흩어져버리는 하루에 사랑과 아름다움의 말을 구석구석 심어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가 한 말은, ‘생에 감사’. 오늘도 빵 한 덩어리만큼의 시간이 손에 쥐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