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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재니져의 출근일지
    • DAY06. 필담 나누는 사이
    • EDIT BY 재인 | 2023. 11. 2| VIEW : 332

    유독 버릴 것을 못 버리는 성격을 타고났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사람들에게 받은 문자 메시지를 지우지 못했다. 사진첩을 비우지 못한다. 다 쓰지도 못한 일기장을, 학습지 뒤에 친구와 주고받은 잡담을, 끝까지 쓰지 못해 전하지 못한 편지를. 버릴 법도 한데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가 가끔 꺼내 보는 것으로 잊힌 날들을 위안한다.

    이상하게 손글씨는 목소리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소리로 재생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느 때처럼 혼자다. 엄마, 아빠는 나보다 먼저 일터로 향했고 밤 사이 방을 채운 눅눅한 공기만 내 곁을 맴돌고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가운 공기를 불러들이며 생각한다.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잠에 대해.

    무엇보다 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는 어릴 때도 나를 깨운 적이 없다. 대신 늦게 잠드는 것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밤이 되면 빛을 찾아볼 수 없던 시골에서 자란 엄마는 어둠이 드리우면 잠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생각은 믿음에 가깝다. 엄마가 어렸을 때 외갓집 앞마당에 콩을 키웠는데, 같은 물을 주고 같은 바람을 맞았는데도 밤에 집에서 새어 나간 빛이 닿았던 땅에서만 콩이 자라지 않았다고. 우리 몸도 콩과 같은 생명이라, 밤에 빛을 맞으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무도 날 깨워주지 않은 덕분에 어린 시절 나는 스스로 잘 일어나는 어린이가 됐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한 건 나였으니까. 지난밤의 꿈과 수면의 질을 헤아려보며 부엌으로 향하면, 늘 그렇듯 차려진 밥상이 보인다. 그리고 옆에 남겨진 메모.

    냉장고에 토마토 쥬스 있어.
    곤드레 나물밥 간장에 비벼 먹어.
    재인 도시락에 챙겨. 다이어트에 좋음.

    목소리가 들리니까 버리질 못 하겠잖아. 소리로 들리는 것이 문제다. 소리에는 생명이 담기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남겨놓은 메모를 모았다. 어느 새부턴 아빠도 엄마를 따라 할 말이 있으면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다 자랐는데도, 이제 너무나 어른인데도, 부모님의 메모는 달라진 것이 없다.

    재인님. 이름으로 불리는 건 기분 좋은 일. 구달 점장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모은 점장님의 메모에 가장 자주 쓰인 단어는 내 이름이다. 우리는 노트북에 있는 메모장을 통해 다음 근무자에게 한 주의 인수인계할 내용을 정리해 두는데 간식에 붙이는 메모는 예외다. 2년 반 동안 모은 점장님의 손글씨가 스물다섯 장 정도 된다. 몇 개는 책갈피로 썼으니 아마 더 많은 메모를 받았을 것이다.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메모 세 개가 있다. 첫 번째는 ‘호랭이 2022 기운’이라는 글씨 아래 호랑이 얼굴을 그려 넣은 메모. 2022년 첫 근무 날 감자칩과 함께 받은 메모다. 두 번째는 겨울 차림새로 선물을 든 캐릭터가 그려진 ‘Merry X-MAS’ 메모. 크리스마스 시즌은 유독 우리가 서로에게 간식을 자주 선물하는 기간이다. 마지막은 코로나를 앓고 돌아온 날 홍삼과 함께 나를 기다리던 메모, ‘재인님 건강 챙겨유!’ 한동안 점장님의 인스타를 뒤져 빌보(점장님의 반려견)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리는데 푹 빠져 지냈다. 일명 메모 아트. 그러면 점장님은 단번에 그게 어떤 사진인지를 알아맞히고, 기쁜 목소리가 들리는 코멘트를 남기셨다. 생각해 보니 메모가 뜸했구나. 이번 주는 나도 내 목소리를 남기고 퇴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