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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 재니져의 출근일지
    • DAY07. 양말가게의 플레이리스트: RIO
    • EDIT BY 재인 | 2023. 11. 23| VIEW : 576

    소빈. 내가 이 곡을 듣고 언니한테 연락을 했죠? 이 노래를 보냈던 날이 생각나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음악을 고르고 문을 활짝 열었는데, 갑자기 소빈이 내 눈 앞에 튀어나와 들판을 내달리는 거예요.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하고, 직선으로, 사선으로, 넘어졌다 일어나서 다시 또.

    소빈이 처음 가게에 들어왔던 날도 생각나요. 검정 코트에 커다란 연두색 목도리를 두르고, 자주색 구두를 신고 한참이나 양말을 골랐어요. 손님의 뒷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도 될지, 어떤 사람이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 느낄 수 있어요. 마스크로도 감추기 어려웠던 미모도 생각나요. 내가 구두가 예쁘다고 하니까 소빈은 갑자기 신이 나 재잘재잘, 성수동 수제화 가게에서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이내 핸드폰을 꺼내 신발을 구매한 사이트까지 열어 보여줬어요. 그때 그 구두도 예뻤지만, 구두보다는 소빈에게 더 눈이 갔던 것 같아요. 그날 소빈은 내 추천을 받아 살색 씨스루 양말을 골라갔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우연히 그 양말을 신은 소빈의 발을 발견했고요. 내가 일러 준대로 자주색 구두에 살색 양말을 신은 소빈의 발.

    어느 날 독립영화제에 갔다가 스크린 위에서 소빈의 얼굴을 마주쳤어요. 아주 찰나였지만 그 짙은 눈은 내가 봤던 눈이 맞았어요. 혹시나 싶어 엔딩 크래딧을 놓치지 않고 살펴보니 감독 역할로 참여한 이름을 찾을 수 있었고요. 신기해서 메시지를 보내자 소빈은 나보다 더 신기해하며 혜화에서 연극을 하고 있으니 보러 오라고 했죠.

    한 시간 반을 두 배우의 대화로만 채운 연극에서 소빈은 시후가 되어 무대의 이쪽과 저쪽을 부지런히 누볐어요. 나에게는 어떤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데요. 소빈을 생각하면 선풍기 앞에 쪼그려 앉아 바람을 맞는 시후가 떠올라요. 그 장면을 본 덕분에 말간 얼굴로 내달리는 소빈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언니. 가게에 들를 때마다 내가 없으면 안부를 묻는 언니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우정이 어떻게 쌓이는지 나와 비슷하게 체득한 사람처럼. 언니도 우정에 익숙한 사람같이 느껴졌어요. 언젠가 내가 언니처럼 밝은 배우는 처음 본다고, 배우를 꿈꾸는 친구들은 어딘가 모르게 지친 구석이 있는데 언니는 그런 기색 없이 씩씩하다고 하니까 언니가 친구들 덕분이라고 했잖아요. 너는 잘 될 것 같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늘 곁에 있었다고.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어떤 무대든 연기를 하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있었다고.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언니가 건강해 보였어요.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모두의 이야기는 아니고 언니 같은 사람들. 우연과 노력을 반복해 내 사람이 되고 만 사람들. 어떤 이야기가 이 사람을 통과했는지 늘 궁금하고 듣고 싶어요. 앞으로도 나는 이 앨범을 들을 때마다 언니가 떠오르겠지? 신기하고 멋진 일이에요. 한 사람이 나를 통과하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내 안에 남아요.